'여섯 개의 손'으로 어루만진 피아노… 라흐마니노프를 입체적으로 빚어내다

입력 2023-12-07 17:40   수정 2023-12-08 08:37



지난 6일 서울 마포아트센터 아트홀 맥에서 열린 마포문화재단 ‘3 PEACE CONCERT’ 두 번째 공연 피날레. 조명이 꺼져 캄캄해진 무대 위로 분주한 발소리가 몇 차례 지나가고 다시 붉은 조명이 켜지자, 무대 중앙엔 피아노 한 대와 의자 세 개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2021년 이탈리아 부소니 콩쿠르에서 준우승한 한국 피아니스트 김도현과 ‘모차르트의 환생’으로 불리는 대만계 피아니스트 킷 암스트롱, 2019년 본 텔레콤 베토벤 국제 콩쿠르 준우승을 차지한 일본 피아니스트 다케자와 유토의 자리였다. 여섯 개의 손을 한 건반 위에 올리기 위해 몸을 아주 가까이 붙어 앉은 세 명의 피아니스트는 잠시 눈을 맞추고 고객을 끄덕이더니 바로 연주를 시작했다.

그렇게 들려준 작품은 라흐마니노프가 10대 때 작곡해 그 나이만의 순수함과 환상적인 감성이 오롯이 담겨있는 ‘여섯 개의 손을 위한 로망스’였다. 이들의 앙상블은 시종일관 입체적으로 조형됐다. 세 명의 피아니스트는 선율을 처리하는 방식이나 선호하는 음색 등 연주 스타일 전반에서 큰 차이를 보였는데, 억지로 서로의 음악을 따라가려고 하기보단 ‘다름’을 인정하고 그 속에서 ‘조화’를 이루는 데 집중한 결과였다. 라흐마니노프가 구태여 하나가 아닌 세 명의 피아니스트를 작품에 불러온 이유를 이들은 정확히 꿰고 있는 듯했다.



저음 선율의 유토는 큰 움직임 없이 건반을 지그시 눌러 치면서 우아하면서도 애수 어린 울림을 불러일으켰고, 고음 선율의 암스트롱은 건반을 스치듯 가볍게 손가락을 굴리면서 반짝이는 윤슬처럼 애처로우면서도 맑은 색채를 섬세하게 펼쳐냈다.

이들의 중심을 잡아주는 건 가운데 앉은 김도현의 몫이었다. 그는 한음 한음 건반을 깊게 누르며 담담하면서도 자연스럽게 라흐마니노프의 서정을 그려냈다. 밀도, 배음, 잔향의 정도를 예민하게 조율하면서도 호흡을 놓치거나 감정에 치우치는 법은 없었다. 점차 타건의 세기를 줄이면서 몽환적인 감정을 속삭이는 주선율을 따라 모든 소리가 사라지는 이들의 연주는 짙은 여운을 남기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피날레 무대가 한국, 일본, 대만을 대표하는 신성(新星) 피아니스트들의 유려한 음악적 대화를 엿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면, 그의 앞선 무대는 세계적인 클래식 레이블 도이치그라모폰(DG)에서 여러 장의 음반을 낸 실력파 피아니스트 암스트롱의 저력을 제대로 확인할 수 있는 자리였다.



암스트롱이 처음 선보인 곡은 바흐의 ‘코랄 전주곡’ 중 BWV 738, 605, 701, 639, 729, 666이었다. 미국과 유럽의 유수 대학에서 생물학, 물리학, 수학, 음악을 두루 공부한 지성파 피아니스트답게 그는 기교나 감정 표현을 지나치게 강조하기보단 바흐의 견고한 구조와 짜임새를 깔끔히 그려내는 데 집중했다. 주요 선율은 단단한 터치와 명료한 색채로 귀에 꽂히도록, 부수적인 선율은 힘을 빼고 편안하게 손을 움직이면서 귀를 스쳐 지나가도록 조절하는 그의 섬세한 연주는 바흐 특유의 정제된 아름다움을 불러냈다.

낭만주의적 색채가 다채로운 장면으로 펼쳐지는 생상스의 ‘앨범 모음곡’에선 자유분방한 에너지를 마음껏 펼쳐냈다. 유연한 터치와 제한된 음량으로 소리에 거대한 막이 쓰인 듯 모호한 심상을 표현하다가도 순식간에 강한 타건으로 악상을 몰아치면서 만들어낸 음영 대비는 손에 땀을 쥐게 할 정도의 긴장감을 선사했다. 역동성을 극대화하는 명료한 리듬 표현은 일관성 있게 나타났다.

다음 곡은 간결한 구성과 생동감 넘치는 표현으로 유명한 모차르트 피아노 소나타 6번. 암스트롱은 ‘모차르트의 환생’이란 별칭이 아깝지 않은 연주를 보여줬다. 모차르트 작품에서 특히 중요한 트릴(두 개의 음을 교대로 빠르게 연주) 표현은 일품이었다. 깨끗하면서도 또렷한 터치로 지속 시간에 따라 색채의 변화를 일으키는 그의 트릴은 모차르트의 활기를 살려내기에 더할 나위 없었다.

느린 춤곡인 2악장에선 왼손과 오른손을 긴밀히 움직이면서 만들어내는 유선형의 자연스러운 울림으로 시적인 정취를 충실히 노래했다. 변주로 이루어진 3악장에선 쉼 없이 변하는 리듬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면서 모차르트 특유의 익살스러운 매력을 전면에 펼쳐냈다. 피아노 음색은 활기 넘치면서도 따뜻했고, 소리의 울림은 명징하면서도 조화로웠다.



그 뒤론 리스트의 작품들이 줄이었다. 먼저 들려준 곡은 이탈리아 시인 토르콰토 타소의 장례식을 묘사한 피에란토니오 세네시의 글에서 영감을 받아 쓴 ‘타소의 죽음의 승리’였다. 암스트롱은 저음 선율은 지하로 파고드는 듯한 무거운 음색으로, 고음 선율은 이에 대비되는 담백하면서도 맑은 음색으로 펼쳐내면서 사색적이면서도 역동적인 작품의 성격을 온전히 드러났다.

이어 연주된 건 리스트의 ‘크리스마스트리 모음곡’ 중 5번(나무 위에 촛불을 밝혀라)과 9번(저녁종). 그는 자연스러운 호흡과 우아한 음색을 유지하면서도 아주 예민하게 각 소절의 음량과 빛깔에 변화를 주면서 신비로운 분위기를 불러일으켰다. 소리의 포물선을 거대하게 키웠다가 차차 울림의 크기를 줄이면서 만들어내는 그의 정교한 연주는 누구도 쉬이 숨을 내쉴 수 없는 결말을 만들어냈다.

'흰 건반, 검은 건반이 하나 되는 순간으로 평화와 화합의 메시지를 전한다.' 3 PEACE CONCERT 공연의 기획 의도다. 분명 이들이 들려준 음악은 그랬다. 추구하는 색채, 모양새, 방향이 다를지라도 하나의 소리로 귀결된 음향은 충분히 조화로웠고, 그 어떤 언어의 외침보다 강렬한 울림을 만들어냈다. '다름' 그 너머의 무언가를 그려볼 만한 연주였다.

김수현 기자 ksoohyu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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